애니MAN #05 『동쪽의 에덴』(2009,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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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쪽의 에덴 02

『동쪽의 에덴』, 카미야마 켄지, 프로덕션 I.G, TV판(2009, 후지TV), 극장판(2009, 2010)

 

 

 

“그는 어쩔 수없이 왕자가 되었다.

우리가 희망하는 내일은 누군가 왕자라는 이름의 희생양이 되어야만 한다는 걸 알았으니까.”

 

 

일본 TV판 애니메이션 『동쪽의 에덴』은 여주인공 사키의 미스터리한 나레이션으로 시작한다. 2009년은 일본경제가 ‘잃어버린 10년’을 넘어 20년에 도달한 해로 취업에 실패한 대학생은 ‘니트’(NEET; Not in Education, Employment or Training)로 낙인찍히던 시절이었다. 여주인공 사키는 대학 졸업여행에서 난생 처음으로 정해진 경로를 벗어나 스스로가 세계의 중심이라고 생각한 백악관을 찾아간다. 그곳에서 운명처럼 남주인공 아키라를 만난다. 『동쪽의 에덴』 1화 제목은 ‘왕자님을 주웠어요’다.

 

 

“자네한테100억이 주어진다면 무엇을 할텐가?”

 

 

어쩐지 동화 같은 분위기와 쿨하고 매력만점의 캐릭터, 어쩌면 왕자를 찾는 로(맨틱)코(메디)물이 아닐까 싶지만 남주인공 아키라는 테러리스트로, 어떤 이유로 기억을 잃은 아키라는 100억 엔으로 일본을 구하는 ‘세레손(선택받은 자)’ 게임에 참여하고 있다. 그러니 로맨틱한 왕자님은 머릿속에서 지워도 좋다.

 

세레손 게임은 미스터 아웃사이드(Mr. Outside)라는 재력가가 설계한 게임으로 그가 선택한 12명은 ‘세레손’으로 불리며 특수한 핸드폰을 지급받는다. 핸드폰에는 100억 엔이 입금되어 있으며, 컨시어지(관리인)인 쥬이스와의 통화를 통해 원하는 것을 요청 또는 명령하면 된다. 요청 내용에는 제한이 없다. 단 사용이력은 12명 모두에게 문자메시지로 전달되고, 잔액이 0원이 되면 그 세레손은 ‘서포터’가 나타나 ‘처리’한다. 경찰, 의사, 관료, 기업가, 학생, 감독 등 각양각색의 인간군상이 세레손이 각자의 이상향을 위해 100억 엔을 집행하고, 개인의 방식은 당연하다는 듯 다른 개인과 마찰을 빚는다. 때문에 이야기 구조는 선행의 드라마가 아니라 쫓고 쫓기고, 맞서 싸우는 하드보일드 미스테리 형식을 취한다.

 

 

동쪽의 에덴 04

이것이 왕자의 얼굴이다

 

 

1989년 1월 7일생

1화는 여러모로 중요한 암시들이 많은데 그 중에서도 둘의 출생일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사키는 1989년 1월 6일생, 그리고 아키라는 1989년 1월 7일생이다. 일본에서 1989년생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일왕에 따라 시대를 구분하는 일본은 1989년 1월 7일 일왕 히로히토 덴노의 사망과 함께 쇼와 시대를 마감하고, 8일부터 그의 아들인 아키히토의 헤이세이 시대가 열렸기 때문이다. 1월 7일생은 쇼와 시대의 마지막 출생자다. 사키와 아키라는 구시대의 종말과 새 시대의 시작 경계지점에서 태어났다.

 

특별한 의미가 있는 해에 태어났음에도, 마치 그런 것 따위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듯 20년이 지난 2009년 대학을 졸업한 사키는 어엿한 청년백수다. 그녀뿐만이 아니다. 대부분의 친구들이 취업을 하지 못했고, 일부는 졸업시기를 늦추기도 한다. 지금 한국과도 다르지 않은 답답한 현실. 사키와 친구들은 이미 사회에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어른들에게 번번이 거절당하며 ‘사회에서 외치는 청년이 필요하다는 구호는, 허울 좋은 말 뿐인 것이 아닐까’ 반문하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안에서 자신들만의 세계를 구축해 간다.

아키라는 이런 ‘니트’에게서 일본의 미래를 발견한다. 도쿄 미사일 침공과 니트족 2만 명 실종사건에 관여했던 아키라는 이런저런 이유로 두 차례 자신의 기억을 지웠음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니트의 가능성에 집중한다. “저 녀석들은 직렬로 이어주기만 하면 꽤 큰 잠재력을 발휘하거든”이라고 말하며. 그 배경에 대해 다소 미스터리 했던 TV판에 반해, 2010년에 개봉한 두 번째 극장판은 아키라의 입을 통해 그의 행동과 가치관에 설득력을 부여한다. “전 돈을 내는 것보다 받는 게 즐거운 사회가 더 건전한 것 같아요.”

 

 

니트의 낙원? ‘동쪽의 에덴’

애니메이션의 제목 『동쪽의 에덴』은 사키와 친구들이 만든 화상검색엔진의 이름이기도 하다. ‘동쪽의 에덴’은 핸드폰으로 사물이나 인물을 인식시키면 그에 대한 정보가 자동으로 표시되는 솔루션이다. 초기에는 한정된 사물과 인물의 정보만 제공했으나 커뮤니티로 확대되면서 다루는 정보의 양과 질이 기하급수적으로 팽창된다.

첫 번째 도쿄 미사일 침공이 있었을 때 니트 족에게 일본을 구한다는 사명감과 성취감을 부여하고자 했던 아키라는 결국 내부에서의 의심과 배신으로 실패하고 만다. 하지만 두 번째 도쿄 미사일 침공에서는 ‘동쪽의 에덴’ 솔루션을 통해 니트들의 기상천외한 아이디어를 집단지성 방식으로 발전시키고, 멋지게 미사일을 격추시킨다. 여전히 아키라의 기억상실로 귀결되는 행로는 변함이 없으나, 이 과정에서 니트 족들과 사키의 친구들은 전세계가 주목한 사건의 한 가운데서 멋지게 해결해냈다는 자부심을 갖게 된다.

 

애니메이션 전반에 걸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소품은 핸드폰이다. 핸드폰은 세레손이 목적을 달성하는 수단이기도 하며, 니트가 지상에는 없는 자신들의 낙원을 만든 도피처이기도 하다. 누구나 가지고 있는 핸드폰으로 일본은 위기에 빠지기도 하고, 또한 위기를 극복하기도 한다. 또한 모두에게 진심을 전하는 메신저이기도 했다. 가장 필요한 것은 결국 소통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걸까?

 

동쪽의 에덴 03

 

 

 

Lost and found

TV판과 극장판 모두 아키라의 기억상실로 시작된다. 세레손 게임의 클라이막스에서 항상 기억을 잃는 아키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예정된 일을 하듯 늘 같은 선택을 한다. 두 번의 기억상실 끝에 난해한 결론으로 매듭지었던 TV판과 달리 극장판은 일본을 구하는 길에 대한 명료한 입장을 전한다. 극장판 말미의 아키라의 테러예고는 TV판 1화의 사키의 나레이션과 대칭을 이루는 『동쪽의 에덴』의 백미다.

 

“지금 새로운 테러를 예고하니 주의 깊게 들어주세요. 전 다시 한 번 수많은 젊은이들과 함께 낙원으로 사라지려고 합니다. 이번엔 반년 전의 2만 명과는 비교도 안 됩니다. 그건 곧 이 나라가 장래의 귀중한 노동력을 잃는단 뜻입니다. 그것을 피하려면 지금부터 제가 하는 요구를 들어주셔야 합니다……”

 

아키라는 일본을 구하기 위해 스스로 왕자가 되려 했다. 하지만 마음을 바꿔 한명의 테러리스트로, 한 명의 니트로서 국가에 공개 제안을 한다. 제안 후 아키라는 작은 약속을 이행하고 미스터 아웃사이드는 게임의 승자를 결정한다. 가진 자의 의무를 묻고 수행했던 아키라는 과연 일본 국가에 어떤 요구를 했을까? 답은 이미 4년 전에 나왔다. 하지만 ‘만약 나라면 100억 엔을 가지고 무엇을 했을까’ 천천히 고민하며 답을 찾아가는 즐거운 모험이 되기를 바란다.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 구세주로서 부족함이 없기를”

 

 

School Food Punishment 1

School Food Punishment

 

보너스, School Food Punishment!!

여담이지만 사실 『동쪽의 에덴』을 보게 된 것은 OST를 만든 ‘스쿨 푸드 퍼니시먼트’(School Food Punishment) 때문이었다. 애니메이션 <UN-GO>와 <C> 등에서 세련된 퓨처리스틱 사운드를 선보였던 ‘스쿨 푸드 퍼니시먼트’는 『동쪽의 에덴』에서도 꿈과 현실, 구세주와 아나키스트의 경계를 허물며 독자적인 세계관을 구축하는데 한 몫 단단히 했다. 명작 애니에는 명작 OST(노래 듣기 클릭)가 함께 하는 법. OST는 『동쪽의 에덴』의 또 다른 큰 즐거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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