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간촉구 #05 하야시 세이이치, 『적색비가(赤色エレジ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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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색비가 표지

『적색비가(赤色エレジー)』

하야시 세이이치(林静一)​, 1970

 
‘러브 스토리’는 영원하다. 사람들이 이에 열광하는 이유는 사랑이라는 감정에 느끼는, 시대를 관통하는 애틋한 정서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모두가 사랑에 울고 웃는다. 마치 어떤 염원을 사랑이라는 감정의 정서적 공감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이뤄낼 수 있다는 믿음이 있는 것처럼. 이유가 어찌되었든 시대에 걸쳐 많은 사람들은 넘쳐나는 러브 스토리를 접해왔고, 어떤 이들에는 러브 스토리가 이제는 식상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이번 작품은 흔하고 흔한 러브 스토리를 특별하게, 그리고 아주 애틋하게 그려낸 하야시 세이이치(林静一)의 『적색비가(赤色エレジー)』다. 1960년대와 70년대를 걸친 시대에 하야시 세이치가 바라본 당시의 풍경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 속에 그려진 러브 스토리는 어떠한 모습으로 다가오는 걸까.

 

 

 

하야시 세이이치(林静一)와 『가로(ガロ)』


하야시 세이이치

하야시 세이이치(林静一).

 

1945년 3월 7일 구 만주국 (현재 중국 동북부) 궁구에서 태어난 하야시 세이이치는 소년기에 어머니가 사준 「소년」을 통해 만화에 열중하는 한편, 삽화의 세계에도 흥미를 가진다. 1962년 3월 일본디자인 스쿨 수료 후, 6월부터 도에이 동화(현재 도에이 애니메이션) 주식회사에 입사하여 애니메이터로 활약한다.

1965년 4월 회사를 퇴직하고 프리랜서로서 만화를 그리기 시작한 그는 1967년 만화 월간지 「가로(ガロ)」 11월 호에 『아구마와 아들과 먹지 못하는 혼(アグマと息子と食えない魂)』을 발표하며 데뷔한다. 이 후 계속해서「가로」에서 꾸준히 작품을 발표해나간다. 1968년, 5월 『고추잠자리』를 시작으로 1970년 1월부터 이듬해까지 1년간, 『적색비가(赤色エレジー)』를 연재한다.

 

하야시 세이이치가 꾸준히 작품을 발표하던 1960년대부터 70년대는 새로운 가치관이나 표현을 모색하던 시기였다. 전 세계가 동시다발적으로 ‘카운터컬처(counter-culture)’를 꽃 피우며 그 흐름을 함께했다. 비틀즈가 록의 상징적인 신기원인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앨범을 발표하고, 앤디 워홀이 벨벳 언더그라운드와 함께 남자의 성기를 연상시키는 자신의 바나나 그림으로 앨범 커버를 디자인 한 「The Velvet Underground & Nico」앨범을 발표했다. 세계가 반전을 외쳤고, 히피의 플라워 무브먼트, 마리화나, LSD, 사이키델릭에 열광했던 배경에는 미국의 베트남전쟁이나 흑인의 공민권운동 등, 시대적 사건들이 존재했다.

만화에서도 카운터컬처가 존재했다면, 그것은 바로 일본의 월간 만화 잡지인 「가로(ガロ)」일 것이다. 시라토 산페이(白土三平)와 쓰게 요시하루(つげ義春)를 시작으로 스즈키 오지(鈴木翁二), 아베 신이치(安部慎一) 등 많은 작가들이 60년대와 70년대를 걸쳐 새로운 가치관과 시대를 살아가는 개인, 인간 본연의 염원 같은 것들을 만화로 그려냈다. 하야시 세이이치 또한 「가로」를 대표하는 작가 중 한 명이었고, 『적색비가』는 하야시 세이이치의 대표작이자, 카운터컬처의 총체인 만화 잡지 「가로」를 대표하는 러브스토리였다.

 

 

 

하야시 세이이치의 『적색비가(赤色エレジー)』

 
애니메이션 프로덕션에서 근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만화가를 꿈꾸는 신출내기 애니메이터 이치로, 역시 애니메이션 프로덕션에 근무하는 사치코는 서로를 사랑하며 동거를 하게 된다. 이치로와 사치코는 서로에게 의지하며, 두 사람의 생활은 잠시나마 행복해 보이지만 이내 냉혹한 현실에 이치로는 사치코를 사랑하면서도 부담감을 느끼게 되고, 사치코 역시 이런 이치로와 함께 할 수 없음을 알게 되고 이별을 준비한다.

 

『적색비가』의 이야기는 위의 내용처럼 뻔하고 흔한 러브 스토리이다. 하지만 이 뻔함이 아주 특별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적색비가』가 보여주는 화법이 기존의 만화의 화법과 굉장히 다르고 생소한 것이기 때문이다. 『적색비가』가 보여주는 화법은 하야시 세이이치의 압도적이고 경이로운 연출력을 전면에 내세운다. 쓰게 요시하루가 1968년 발표했던 『나사식(ねじ式)』을 계기로 만화계에서도 새로운 표현방법을 찾게 되었는데, 하야시 세이이치 또한 마찬가지였다. 애니메이터 출신인 장기를 살려 스피디하면서도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분방함과 실험적인 컷 구성을 통한 연출력을 보여준다. 컷 안에 표현된 이미지와 기호의 상징을 통한 이야기의 암시, 작품 내에 깔린 초현실적인 무드는 자칫 뻔하고 흔할 수도 있는 러브 스토리를 아주 색다르고 신선하게 그려내고 있다. 사치코가 돌아오지 않는 이치로를 걱정하며 기다리는 장면이나, 전등의 이미지를 통해 사치코의 감정을 표현하며 앞으로 일어날 불안한 사건에 대한 암시를 하는 장면, 이치로의 아버지가 자살을 결심하는 장면 등을 접하게 되면 아마도 신선한 충격을 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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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치코가 이치로를 걱정하며 기다리는 장면. 배경과 전등이 사선으로 배치되어 어딘가 불안정한 투시와 구도로 인해 사치코의 불안한 감정을 드러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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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갔었어?”
첫 번째 컷의 사치코와 전등의 실루엣은 마치 사치코가 목을 매어 자살한 것처럼 보인다. 사치코가 이치로에 느끼고 있는 복합적인 감정을 드러냈다. 작품 전반부에 걸쳐 ‘전등’이라는 장치를 이용, 반복적으로 감정을 드러내고 이야기를 암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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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치로의 아버지가 자살을 결심하는 장면. 도마뱀과 떨어져 있는 벚꽃이 앞뒤의 맥락과 관련 없이 등장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삶과 죽음의 역설을 드러내는 상징적 기호로서 존재한다.

 

 

『적색비가』는 실험적인 화법에서 느껴지는 비범한 작품임에 분명하지만, 다르게 보면 생소한 화법 때문에 다소 어렵게 느껴질 만한 작품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에 깊이 감명받을 수 있는 이유는 러브 스토리가 지닌 특유의 서정성을 간과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치로와 사치코의 만남과 이별의 과정에는 왠지 모를 애틋함과 슬픔 같은 감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 표현 방법이 하야시 세이이치의 화법을 통해 더욱 생생하게 독자에게 전달된다. 특히 후루야 우사마루의 『파레포리』에서 패러디 한 마지막 장면은 꽤나 유명하다. 사치코와 헤어진 후 슬퍼하는 이치로의 모습에 받는 생생한 감정은 도저히 말로 형용하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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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도 그렇게 생각했지…”

 

 

 

이치로와 사치코는 금전적으로도 시간적으로도 여유가 없는 냉혹한 현실에 부딪히며, 당시에 일어났던 베트남 반전 시위나 학생집회 같은 것이나 카운터컬처의 흐름과 동떨어져 살고 있다. 그들의 삶은 보잘 것 없어 보이기까지 하며 그들의 사랑 또한, 그저 꿈 같이 허무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치로와 사치코도 당시의 시대가 새로운 가치관을 염원하고 있었던 것처럼, 분명히 특별한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결국 하야시 세이이치가 그들의 러브 스토리에 투영시켰던 것은 작가 본인의 염원이 아니었을까.

 

『적색비가』는 앞서 이야기 했던 새로운 가치관이나 표현을 모색하던 시기에 그려진 작품이다. 생각해보면 지금의 시대와 『적색비가』를 그렸던 시대는 비슷한 부분이 많은 것 같다. 『적색비가』가 담고 있는 간절한 염원은 아직까지도 시대를 관통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개인적은 감상을 뒤로 하더라도, 『적색비가』는 지금도 읽을 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는, 시대를 대표하는 러브 스토리임에는 분명하다. 명작은 시대를 관통해서 화자 되기 마련인데, 『적색비가』또한 그러한 작품이라 확신한다. 꼭 국내에서 정식으로 출간되어 많은 독자들이 읽어볼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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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서적 및 문헌

1. 『적색비가(赤色エレジー)』 – 하야시 세이이치(林静一), 1970
2. 에세이, 우리들의 폭력이나 살육이 언제 그칠지도 모르는 바로 지금… – 아가타 모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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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진 소개

올드하고 마이너한 취향을 지닌 만화 덕후. 특히 일본 고전만화를 좋아하며 쓰게 요시하루와 아베 신이치의 만화를 보고 감명 받아 만화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만화를 독학으로 공부해왔다. 현재는 페이스북에서 ‘무능력한 사람의 만화연구소’라는 만화 관련 페이지를 운영하고 있다. (부실하고 제멋대로 운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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