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상준의 불가항력 만화방 #43 허니와 클로버

0

 

 

 

 

re_허니와 클로버 표지

허니와 클로버 ハチミツとクローバー

 우미노 치카(羽海野チカ) | 슈에이샤(集英社) / 학산문화사 | 2000년 연재 시작 | 2006년 10권 완결

 

 

 

 

“시간이 흘러, 모든 것이 추억이 되는 날은 반드시 온다. 하지만…, 내가 있고, 네가 있고, 우리가 있고, 단 하나의 뭔가를 찾던, 그 기적 같은 나날은, 언제까지고 달콤한 아픔과 함께, 가슴 속의, 먼 곳에서 영원히, 그립게 빙글빙글 돌 것이다….”

 

– 『허니와 클로버』 대단원 중

 

 

 

 

연애의 조건이란 실은 간단하다.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이 자신을 좋아해주는 것. 고작 이 정도의 조건이다. 하지만 이 작은 요건조차 “영원히 채워지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 연애요, 사랑이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어찌된 일인지 날 쳐다보지 않는다. 그래서 힘겹게 단념하려 하지만 그것조차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 마치 서툴고 더디기에 더더욱 빛나는 청춘 그 자체와도 같아 보인다. 우미노 치카의 장편 데뷔작 『허니와 클로버』는 불투명한 미래를 마주한 청춘들의 서툰 사랑을 그린 작품이다. 다섯 명 미대생들의 우정과 사랑을 통해 청춘들의 흥겹고도 가슴 시린 이야기를 담아낸 담백한 순정만화이자 유려한 청춘만화다. 여기엔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방황하다 기어이 자전거 페달을 밟아 땅 끝까지 가고 나서야 얻는 갚진 깨달음이 있다. 끝까지 외면 받을 짝사랑인 걸 알면서도 끝내 마음을 접지 못하는 순정도 있다. 재능 있는 자는 재능에 짓눌린 나머지 조금씩 희미해져가는 인생의 의미를 되묻고, 재능이 부족한 사람은 자신이 몰두할 것을 찾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이들의 보호자 격으로 등장하는 하나모토 교수의 말마따나 젊다는 건 참으로 성가셔 보인다. “풋내 나고 고지식”해서 “애써 시간이 걸리는 방법을 선택”하곤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때문에 『허니와 클로버』의 청춘들이 만들어가는 진솔한 자기고백은 늘 잔잔한 울림을 자아낸다.

 

 

 

허니와 클로버 04

 

 

 

미대생 다케모토는 도쿄로 상경해 낡은 공동주택에서 선배인 모리다, 마야마와 함께 대학생활을 한다. 떠들썩한 학창시절을 보내던 다케모토와 모리다는 하나모토 교수의 조카(사촌의 딸, 5촌)인 서양화과 신입생 하구미에게 첫눈에 반한다. 한편 건축과생 마야마는 건축사무소에서 아르바이트하면서 연상의 디자이너 리카를 사모하게 되지만 리카는 그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마야마를 좋아하는 도예과의 야마다는 마야마에게 고백하지만 거절당한다. 다케모토, 모리다, 마야마, 하구미, 야마다, 다섯 명은 각자의 사랑을 마음에 품은 채 늘 함께 시간을 보내고 어울리며 다시는 되돌릴 수 없을 달콤쌉싸름한 시절을 만들어간다.

 

 

이 작품에는 두 개의 삼각관계가 등장한다. 하구미를 좋아하는 다케모토와 모리다로 구성된 삼각관계가 첫 번째요, 리카를 좋아하는 마야마, 반면 마야마를 좋아하는 야마다로 구성된 일방통행 관계가 그 두 번째다. 삼각관계가 무려 둘이나 되지만 그렇다고 얽히고설킨 복잡한 관계를 직조해가는 것도 아니고, 오직 연정만이 중심에 놓이는 법도 없다. 심지어 두 가지 삼각형은 구조부터 완전히 다르다.

다케모토는 자신이 하구미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도 오랜 시간이 걸리고 그걸 깨닫고 난 후에도 어찌할 바를 모르는 순진하고 소박한 성격의 소유자다. 반면 모리다는 누구에게나 재능을 인정받는 천재일 뿐만 아니라 “타인의 말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괴짜 중의 괴짜이기도 하다. 그는 늘 보통사람이라면 맨 정신으로는 할 수 없을 행동을 벌이며 다케모토와 마야마 등에게 폐를 끼치기 일쑤다. 또 느닷없이 종적을 감추다 몇 달 만에 출처를 알 수 없는 큰돈을 벌어오는 등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인간이기도 하다. 하구미 역시 신입생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여기저기서 작품을 요청해오는 천재 중의 천재. 사람들은 하구미의 작품을 보며 “한번쯤 하구미가 되어 하구미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싶다. 과연 어떻게 보일까…”라고 말하곤 한다. 때문에 모리다 역시 다케모토와 마찬가지로 하구미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깨닫는 데까지 무척 오래 걸리지만 방식은 다케모토와는 전혀 다르다. 다케모토는 자신이 앞으로 해야 할 일은 무엇인지, 과연 어떤 인간으로 성장해야할지를 치열하게 고민한 끝에 마침내 하구미에게 고백한다. 반면 모리다는 자신과 달리 유약하고 내성적인 하구미가 떠안은 스트레스를 점차 진심으로 이해하면서 조금씩 하구미에게 다가선다. 각별한 우정으로 똘똘 뭉친 세 사람이 점차 사랑이라는 새로운 감정에 눈을 뜨는 과정 하나하나는 이렇듯 한 사람 한 사람의 성장과 맞닿아 그 감정의 크기와 형태를 진득하게 완성해간다.

 

그에 비해 마야마, 야마다, 리카의 사랑은 결코 맺어질 수 없는 상대를 향한 순애보로 이루어져 있다. 리카에겐 죽은 남편의 존재가 너무 크다. 그는 다리가 불편해 목발을 짚고 다니면서도 살아생전 남편이 사준 낡은 하이힐을 여전히 소중하게 신고 다닌다. “사랑하고 사랑받았던 기억이 그녀를 칭칭 얽어맨다. (…) 그녀가 사는 곳은 아마 이 해질녘처럼 영원히 개이지 않는 비와 안개의 나라.”라는 야마다의 독백만큼 리카가 세상을 향해 쌓은 장벽을 잘 설명해주는 말은 없어 보인다. 리카를 향한 마야마의 사랑만큼이나 야마다의 순애보 또한 절절하다. 야마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는 모리다는 묻는다. “정말 모르겠네. 그렇게까지 바보란 걸 잘 알면서, 왜 아직도 마야마를 좋아하는 거야?” 야마다가 말하길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야!! 정말 모르겠어. 내내 좋아했는데. 이젠 단점만 자꾸 떠오르는데. 그런데, 목소리, 듣고 싶고. 손도 잡아보고 싶고…, 그렇단 말이야….” 투박한 말이지만 스스로도 제어할 수 없는 애절한 사랑이 그대로 느껴지는 꾸밈없는 말이기도 하다. 야마다를 밀어내기만 하는 마야마를 대신해 곧 마야마의 직장 선배인 노미야가 그 자리로 끼어들기도 하지만 마야마를 대체하기란 쉽지 않다. 남들이 보기엔 그저 한심하고 초라해 보일지 몰라도 마야마를 좋아했던 마음까지 거짓이 되는 것은 싫다는 그 이유 없는 순정이 여전히 야마다의 마음을 단단히 붙들고 있기 때문이다.

 

 

허니와 클로버 05

 

 

 

어디로 튈지 모르는 사랑,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과 면밀히 직조된 캐릭터 개개인의 성장사 또한 흥미롭다. 하나모토 교수를 시작으로 이들은 차례로 누군가의 부재를 맞이한다. 떠난 자와 기다리는 자 사이의 공백이 만들어내는 개개인의 심경 변화는 사랑뿐만 아니라 청춘의 성장까지도 잘 드러낸다. 누군가의 빈자리를 통해 이들은 비로소 “‘세상’ 같은 막연한 것에 필요한 존재가 되기보다는, ‘특정한 누군가’가 필요로 해주는 편이 인간으로서 행복한 게 아닐까?”라는 물음의 진짜 답을 얻는다. 특히나, 보통 이상으로 활달하거나 혹은 과하게 어두운 다른 캐릭터들에 비해 조금은 색이 옅어 보이는 다케모토의 성장은 극 후반으로 갈수록 점점 더 집요하게 내면에 감춰진 답을 찾아간다. 다케모토는 좋아하는 선배지만 어쩌면 사랑의 라이벌일 수도 있는 모리다가 미국으로 떠나는 것을 바라보면서 그가 돌아오면 좋겠는지 돌아오지 않았으면 좋겠는지 선뜻 답을 내놓지 못한다. 그래서 자신보다 몇 배는 큰 캔버스와 마주하며 흡사 “격투”하듯 작업하는 하구미의 뒷모습을 보며 그는 모리다를 떠올린다. 그리고는 자신은 “들어갈 수 없는 세계”라고 생각한다. 이윽고 다케모토는 미적 형태나 균형감과는 무관히 그저 높이 쌓아가는 데에만 여념 없던 자신의 작품을 “꼴사나운 탑”이라 칭하며 말한다. “꼭 나를 닮았어.” 자신에겐 그 둘과는 달리 처음부터 목적지 같은 것이 없었다는 것을 깨닫고 그는 쌓아올린 탑을 부순다. 그리고는 어느 날, 무작정 자전거를 타고 내달리다 그 길로 죽 일본 열도 최북단까지 가기로 한다. 길고 고단한 여행을 통해 새로운 경험을 하며 비로소 장래 하고 싶은 일을 결정하고 돌아온 다케모토. 그는 드디어 하구미에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한다. 안타깝게도 ‘고맙다’는 말과 함께 받아들여지진 않지만 그렇다고 후회하진 않는다. 아주 오래 전 했어야 할 말을 꺼냈기에 그저 가슴 벅차도록 행복했다고 담담히 말할 뿐이다.

인물의 침잠하는 감정선과 병치되는 내레이션은 순정만화 특유의 감수성을 극대화하며 다양한 캐릭터 각자의 내밀한 속내는 물론 작품의 층위마저 한층 두텁게 한다. 술에 취해 마야마의 등에 업혀 집으로 향하는 야마다의 입에선 연신 “마야마 좋아. 너무 좋아” 같은 날것의 말들이 계속해서 흘러나온다. 그리고 이를 “마야마의 등은 넓고, 셔츠의 칼라 언저리에서는 따뜻한 살냄새가 났다. 처음이자 마지막일지도 모르는데 왠지 그리운 냄새라는 생각이 들었다.”는 독백이 뒷받침함으로써 마야마를 향한 야마다의 애틋한 감정은 배가된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읜 다케모토에게 크리스마스란 늘 달가운 존재가 아니었다. 그러다 하구미와 친구들과 함께 크리스마스를 보내며 그는 생각한다. “나는 크리스마스가 별로였다. 색색으로 깜빡이는 이 전구를 볼 때마다 가슴이 아파서. ‘넌 지금 행복하냐?’ ‘네가 있을 자리는 있냐?’고, 누군가 따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그런데, 그런데, 올해는…. 12월의 이 반짝이는 거리 한가운데서도, 한 번도 외롭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충만한 행복감을 이렇게 담아낸다. “그리고 나는 계속 눈을 깜빡였다. 마치 셔터를 누르는 것처럼. 이 순간이 내 마음 속 어딘가에 찍히면 좋겠다고.”

 

 

 

허니와 클로버03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고, 청춘은 방황한다. 미래는 불투명하고, 이들 하나하나의 감정은 대개 침잠하기 일쑤다. 그럼에도 『허니와 클로버』는 절대 어둡지 않다. 오히려 극 전체의 분위기는 한없이 밝다. 사실 이 작품은 다양한 개그코드와 과장된 개그신이 난무하는 코미디 만화로도 볼 수 있을 정도다. 도무지 정상으로는 보이지 않는 모리다 같은 캐릭터만이 아니다. 평소 마야마를 향한 애절한 순애보와는 무관히 화가 나면 치마를 입고 있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상대의 머리를 발로 내려찍는 야마다의 과장된 행동들은 극을 한층 환하게 만든다. 여기에 가난한 대학생을 소재 삼은 유머와, 어떤 음식이건 무조건 달콤한 재료를 첨가하는 야마다와 하구미의 황당한 레시피도 빠질 수 없다. 미대생의 특징을 살린 개그 역시 포복절도할 만하다. 사진을 참고해 ‘캐리커처 빵’을 만들던 이들은 이내 경쟁심이 발동해 좀 더 입체적으로, 사실적으로 묘사한 나머지 마지막엔 “아빠 얼굴 닮은 빵”이 아니라 “그을린 아빠 머리통”처럼 보이는 빵을 만들기도 한다. 이런 개그들은 절대 국면전환용도 아니고 분위기쇄신용도 아니다. 자연스럽게 배경과 분위기에 배어 인물들 간의 격의 없는 관계를 부각할 뿐만 아니라 고민하고 아파하는 인물들을 보듬으며 밝고 따사로운 분위기를 유지한다. 급전하는 특별한 사건을 반복하기보다는 그저 소소한 일상을 함께 보낼 뿐인데도 점점 더 애틋하게 발전하는 이들의 관계를 스스럼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것 역시도 왁자한 코미디가 만들어가는 청량한 기운 때문일 것이다.

제대로 된 연애를 보여주기보다는 끝내 외면당하는 사랑만을 보여주던 이야기는 작품 말미에 이르러서야 어렵사리 결과를 낸다. 하구미와 맺어지는 이는 좀 더 의외의 인물이고, 리카와 마야마의 관계는 진전을 보인다. 야마다 역시 새로운 사랑을 향해 조금씩 마음을 연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에도 의미를 담아내고 있다는 점이다. 떠나는 누군가에게 하구미가 건넨 샌드위치는 과연 늘 대작을 만드는 하구미답게 식빵 한 통을 통째로 사용한 듯 보인다. 그러나 단순히 크기만이 아니다. 여러 겹의 샌드위치 사이사이에는 모든 면마다 네잎클로버가 채워져 있다. 과거 몽골로 떠나는 하나모토 교수에게 선물하려 했지만 다섯 명이서도 단 한 개를 찾을 수 없었던 그 네잎클로버가. 그렇게 실패한 사랑에도 의미가 있을까 하는 의문에 “의미는 있다. 있었던 것이다.”라며 힘주어 답을 내어준다. 이루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충만한 사랑뿐만이 아니다. 하구미가 그를 위해 엄청난 노력을 들여 찾아 헤맸을 네잎클로버처럼 다섯 명이 함께 네잎클로버를 찾던 추억 역시 영원히 그들의 가슴에 남아있을 테니까 말이다. 청춘의 밝고 명랑한 기운과 안타까운 사랑이 공존하는 『허니와 클로버』는 그렇게 “달콤한 아픔”이라는 역설이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청춘의 한 자락을 정말이지 한껏 소환해낸다. 그야말로 청춘의 편린이자 표상이 오롯이 서린 걸작 청춘만화다.

 

 

 

 

공유하기

필진 소개

서강대 국어국문학과, 신문방송학과 졸업. DVD2.0, FILM2.0, iMBC, BRUT 등의 매체에서 줄곧 기자로 활동하면서 영화, 만화, 장르소설, 방송 등 대중문화 전반에 대한 글을 쓰며 먹고 살았다. 『위대한 망가』를 썼고, 『매거진 컬처』『젊은 목수들』을 공저했으며, 『공포영화 서바이벌 핸드북』을 번역했고, 『좀비사전』『탐정사전』을 기획, 편집했다. 현재는 프리랜스 라이터 겸 프리랜스 편집기획자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