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녀PD의 BDDB] #16 the WOMEN POWER! : 프랑스 만화 속 여성 캐릭터 발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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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세계적인 영화감독 뤽 베송(Luc Besson)이 차기작을 발표했다. 프랑스 SF만화의 명작이라 손꼽히는 『발레리앙과 로울린(Valérian et Laureline)』을 영화화 한다는 소식이었다(영화 제목은 현재 《발레리앙과 천개 행성의 도시(Valerian and the City of a Thousand Planets)》로 알려져 있다). 『발레리앙과 로울린』은 프랑스 글 작가 ‘피에르 크리스탕(Pierre Christin)’과 그림 작가 ‘정-클로드 메지에르(Jean-Claude Mézières)’의 작품으로, 사실 뤽 베송 감독은 아주 오래전부터 이 작품의 열혈 팬을 자처하며 작품에 대한 관심을 지속적으로 내비쳤다고 한다. 2012년, 드디어 정식 영화화 계약을 통해 올해 구체적인 배우 캐스팅을 확정했고 2017년 개봉을 목표로 크랭크인에 들어갔다는 소식이 들려온 것이다.

 

『발레리앙과 로울린(Valérian et Laureline)』 단행본 표지들

『발레리앙과 로울린(Valérian et Laureline)』 단행본 표지들

 

『발레리앙과 로울린』이 처음 연재된 것은 1967년 유명 만화 잡지 《필로트(Pilote)》를 통해서였다. 이 작품은 제목 그대로 남자 주인공 ‘발레리앙’과 여자 주인공 ‘로울린’이 시간과 공간을 여행하며 펼쳐지는 미래시대 이야기이다. 발표 당시 만화의 원제는 『발레리앙, 시공의 에이전트(Valerian, agent spatio-temporel)』였다. 작품명이 변경된 것은 시리즈 40주년을 기념하던 해인 2007년이었다. 제목이 바뀐 이유는 간단했지만, 널리 인정받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처음 이 작품의 주인공은 (그 당시 다른 대부분의 작품들처럼) 남자 주인공 발레리앙이었다(으로 보였다). 하지만 시리즈가 거듭될수록 주인공은 여자 캐릭터인 로울린으로 바뀌어갔다. 원작자도 이 작품의 진짜 주인공은 ‘로울린’이라 밝힌바 있다. 작가가 1960년대 미국을 여행하던 당시, 프랑스의 여성상과 다른(참고로 당시 미국에는 ‘원더우먼’, ‘캣 우먼’ 등의 강인한 여성 만화 캐릭터가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남자 캐릭터에 의존하지 않는 독립적이며 전투적인 신여성상을 접하게 되었고 그런 여자 캐릭터를 만화 속에 반영했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 시대적인 환경 때문이었는지, SF장르에 여자 주인공이 이야기를 이끌어간다는 것이 독자들의 반응을 얻기에 적합하지 않을 것이라 판단하였기 때문이었을까? 작품 초기 ‘발레리앙’을 주인공으로 이야기를 전개했으나 작가들이 부여한 ‘로울린’의 지적이고 자립적이며, 단호하면서도 섬세한 그녀의 모습에 매력을 느낀 독자들의 성원에 힘입어 마침내 작품의 진정한 주인공으로 인정받았다. 그것이 이어져 2007년 『비석들의 차원(L’Ordre des Pierres)』 시리즈부터 로울린의 이름이 더해진 지금의 제목으로 완전히 바뀌게 되었다(그러나 아쉽게도 제목이 『로울린과 발레리앙』으로 바뀌지는 않았다!).

 

『베카씬(Bécassine)』. 프랑스 만화 최초의 원톱 여자 캐릭터 만화다. 베카씬 이란 캐릭터는 우리가 흔히 기대하는 명석하고 재기넘치는 여성 캐릭터와는 거리가 있었다.

『베카씬(Bécassine)』. 프랑스 만화 최초의 원톱 여자 캐릭터 만화다. 베카씬 이란 캐릭터는 우리가 흔히 기대하는 명석하고 재기넘치는 여성 캐릭터와는 거리가 있었다.

 

그럼 ‘로울린’ 이전에는 프랑스 만화에 여자 주인공이 없었을까? 지금으로부터 110년 전인 1905년. 최초의 여자 주인공(‘로울린’과 달리 만화의 온전한 히로인이었던) ‘베카씬(Bécassine)’이 있었다. 이 작품은 1871년 생 프랑스 작가 ‘에밀-조제프-뽁삐흐 빵숑(Émile-Joseph-Porphyre Pinchon)’의 만화로 당시 소녀 잡지 《수제트의 주(La Semaine de Suzette)》 창간호에 연재를 시작하며 엄청난 인기를 누렸던 작품이다. 하지만 여기서 그려진 주인공 ‘베카씬’은 다소 안타까운 여성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만화 속 그녀의 모습이 어찌나 바보 같았으면 이 작품 이후 ‘Bécassine’이라는 단어는 프랑스어로 원래 의미인 ‘도요목의 조류’ 외에 ‘미련하고 어리석은 멍청한 여자‘라는 뜻으로도 쓰이게 되었다. ‘베카씬’은 프랑스의 가장 북서쪽인 ‘브르타뉴(Bretagne)‘ 지방의 시골 소녀로 만화는 고향을 떠나 파리에 정착하며 겪는 그녀의 삶을 그리고 있다. 하지만 이런 여성 캐릭터로 묘사된 것을 작가의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었던 이유도 있다. 우선 작가는 베카씬을 코믹 캐릭터로 설정했기 때문에 다소 우스꽝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더불어 당시 여성의 인권이 제대로 보장받지 못했던 시대에 더 선진화 된 여성 캐릭터를 창조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이 작품이 가톨릭 성향의 출판사가 발행하는,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잡지에 연재가 되었다는 점. 결정적으로 잡지《수제트의 주(La Semaine de Suzette)》의 발행인이자 에디터였던 모리스 랑구에로(Maurice Languereau), 필명 코우메히(Caumery)가 초기 ‘베카씬’ 설정에 대한 아이디어를 제공했고 잡지의 에디터 작클린 히비에르(Jacqueline Rivière)까지 작품의 글 작가로 참여했다는 점에서 베카씬 캐릭터에는 다분히 종교적 특성이 반영되었으며 시대를 고려했을 때 순종적이고 수동적인 여성상을 보여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베카씬(Bécassine)』. 시골에서 파리로 상경한 무지한 여자의 전형을 연기한 이 캐릭터는 여성인권이 존중받지 못하던 시대의 산물이다

『베카씬(Bécassine)』. 시골에서 파리로 상경한 무지한 여자의 전형을 연기한 이 캐릭터는 여성인권이 존중받지 못하던 시대의 산물이다

 

프랑스 만화 히로인의 역사를 바꾼 것은 바로 1962년 《매거진V(V Magazine)》에 첫 선을 보였던 프랑스 만화가 ‘정-클로드 포레스트(Jean-Claude Forest)’의 작품 『바바렐라(Barbarella)』를 꼽을 수 있다. 지난 칼럼(#05)을 통해 이 ‘바바렐라’ 캐릭터가 프랑스 유명 여배우 ‘브리짓 바르도(Brigitte Bardot)’를 모델로 하였다고 언급한 바 있듯 그녀는 외모적으로 ‘바르도’를 완벽하게 재현한 듯 긴 속눈썹과 도톰한 입술, 볼륨감 있는 몸매에 쫙 붙는 의상과 도발적인 표정까지! 분명 ‘베카씬’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파격적이고 적극적인 여성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바바렐라의 파격적 면모 때문에 규제의 대상이 되었으나, 그녀의 어마어마한 인기는 규제로도 막을 수 없었다. 『바바렐라』는 성인을 타겟으로 한 만화시장의 문을 연 선구자였을 뿐 아니라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만화 전반에서 몸을 훤히 드러낸 나체 상태의 여성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게 되었다.

 

『바바렐라(Barbarella)』. 그 유명한 캐릭터인 바바렐라도 여성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당시 몇 안되는 작품이었다.

『바바렐라(Barbarella)』. 그 유명한 캐릭터인 바바렐라도 여성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당시 몇 안되는 작품이었다.

 

『바바렐라』가 『베카씬』에 비해 분명 해방된 자유로운 여성상을 보여주고 있지만 그녀는 아름다운 얼굴과 글래머스한 몸매의 소유자였으며 심지어 성적 욕구를 표현하는데 있어서도 솔직한, 그야말로 섹시 캐릭터 그 자체였다. 그러기에 그녀는 다른 작품의 남자 캐릭터들과 같이 작품 속에서 남성과 동등한 역할이 부여된 진정한 히로인으로 인정받기는 다소 어려웠다. 인형 같은 외모로 섹스어필 하거나, 여성성이 강조됨이 없이 온전히 작품의 주인공으로 인정받은 여성 캐릭터는 바로 프랑스 작가 ‘자크 타르디(Jacques Tardi)’의 1976년 판타지 모험물 『아델 블랑섹의 기이한 모험(Les Aventures extraordinaires d’Adèle Blanc-Sec)』 시리즈의 주인공 ‘아델 블랑섹(Adèle Blanc-Sec)‘이라고 볼 수 있다(우연하게도 뤽 베송 감독은 2013년 이 작품을 영화화한 바 있다. 한국에는 《블랑섹의 기이한 모험》》이라는 이름으로 소개되었다) .

 

『아델 블랑섹의 기이한 모험(Les Aventures extraordinaires d’Adèle Blanc-Sec)』 .

『아델 블랑섹의 기이한 모험(Les Aventures extraordinaires d’Adèle Blanc-Sec)』 .

 

보다시피 그녀의 외모는 ‘아름답다’고 말하기는 다소 어렵다. 몸매가 좋은가? 옷을 세련되게 입었는가? 글쎄…. 블랑섹의 외양이 미인은 아닐지 모르지만, 총명하며 사회적인 직업(그녀는 대중소설을 쓰는 연재 소설가였다)이 있으며 호기심이 많고 자유로우면서도 품위가 있었다. 어디 그뿐인가. 50도에 달하는 독한 술과 담배를 피우는 그런- 그야말로 ‘남자 같은’ 여자 캐릭터였다(당시 유럽 만화 속 남성 캐릭터들은 여성 캐릭터와는 달리 담배와 술은 기본적으로 즐기는 게 대부분이었다). 1970년대에도 이런 여성 캐릭터의 등장은 상당히 놀라웠지만, 이 작품이 의미가 있는 이유는 바로 작가가 이 작품의 배경을 의도적으로 1910~20년대로 설정했다는 것이다. 그녀는 당시 실존할 법한 캐릭터로 보기 힘들지만, 미스터리한 사건과 기이한 상황들을 씩씩하게 해쳐나가는 모습을 보여주며 분명 독자들로 하여금 속 시원하게 만드는 매력적인 캐릭터였던 것이다.

 

1970년대 이후 프랑스 만화 속 여자 주인공들은 더욱 발전된 여성상을 보여주었다. 이전 에는 대부분 남자 주인공의 보조 역할에 한했다거나, 독립적이기 보다는 중요한 순간에 주인공에게 민폐가 되기 일쑤였다. 또한 뻔뻔하거나, 약간 모자라지만 몸매는 지나치게 섹시한 인물로 묘사되었다(마치 영화 ‘007’ 시리즈의 전형적인 여자 캐릭터들처럼). 시대가 바뀌며 ‘바바렐라’처럼 자신의 솔직함을 그대로 표현하는 적극적인 여자 캐릭터나, ‘로울린’처럼 기꺼이 남자 주인공과 함께 임무를 완수 할 수 있는 진일보한 캐릭터들의 등장으로 현재 프랑스 만화 속 여자 캐릭터들의 위치와 역할은 많이 상향되긴 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남자 캐릭터들과 비교하자면(프랑스를 대표하는 캐릭터 땡땡(Tintin), 코르토 말테제(Corto Maltese), 루키 루크(Lucky Luke), 블렉과 모르티메(Blake et Mortimer)등) 동등한 위치에서 활약을 펼치는 여자 캐릭터는 많지 않다. 남성 히어로만큼 여성 히로인들이 기를 펼 날은, 씁쓸하지만 조금은 멀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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