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MAN #09 동경표류일기 (Tatsumi,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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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표류일기_포스터

『동경표류일기』 감독 에릭쿠, 96분, 싱가포르, 2011년 제작, 2015년 국내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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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울었다. 남자도 울었다. 야스쿠니도 함께 울었다.”

퇴직을 앞둔 중년의 남자가 밤거리를 걷는다. 회사에는 일이 없고, 집에는 퇴직금 계산만 하고 있는 아내와 딸뿐이다. 아내와 내연 관계였던 괘씸한 사위는 그 옆자리를 꿰차고 있다. 가족을 위해 일생을 살아온 남자는 치밀어 오르는 분을 참지 못하고 아내에게 복수를 하기로 결심한다. 차곡차곡 모아온 비자금으로 일생일대의 바람을 피우기로 작정한 것. 남자는 상대를 찾아 밤거리를 헤매지만 여자들이 만만치 않다. 시행착오 끝에 최고의 상대를 만나고 바람은 절정을 향해 날아오른다. 모두가 얼굴 붉히며 숨죽여 지켜보는 그 순간, 신음하듯 안타까운 나레이션이 흘러나온다. 2일 개봉한 애니메이션 『동경표류일기』(Tatsumi, 2011)속 이야기 중 하나다.

『동경표류일기』는 ‘극화(劇画)’라는만화 장르를 개척한 일본 만화가 타츠미 요시히로(1935~2015)의 일생과 그의 대표작을 함께 엮은 작품이다. 작품의 줄기는 타츠미 요시히로가 전업 만화가가 되기까지의 여정에 초점을 맞춘다. 유년시절 그에게 전부였던 만화가 테즈카 오사무에서 출발해 어려운 가정환경과 불운한 만화 습작들, 전업 만화가로의 일상과 성인들을 위한 사실체 만화 ‘극화’를 만들어 내기까지의 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그야말로 만화 신대륙을 향해 표류하던 전업 만화가의 애환과 기쁨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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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몰아치듯 창작에 몰입하는 청년 타츠미(상), 야스쿠니도 울린‘남자 한 방’(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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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순간 응원하게 되는 ‘극화의 힘’

타츠미의 만화 인생 챕터와 챕터 사이에 시대를 담은 그의 작품들이 소개된다. 패전 일본이 열광한 사진의 진실을 끝내 침묵한 종군사진가의 참회(‘지옥’), 친구는 원숭이뿐인 공장노동자의 고독한 도시생활(‘내 사랑 몽키’), 퇴직을 앞둔 중년 아버지의 일생일대 복수(‘남자 한 방’), 화장실 낙서에서 신세계를 발견한 만화가의 유희(‘안에 있어요’), 미군에게 버림받고 아버지에게 몸을 던지는 양공주의 절규(‘굿바이’) 등 어둡고 슬펐던 시대의 기억이 차례로 관객을 찾아온다.

집안 형평상 학창 시절부터 만화로 돈을 벌었던 타츠미의 경험 때문일까? 다섯 주인공 모두 생계를 꾸려가는 고단한 사회인의 모습이다. 여자라고 예외는 없다. 비서, 웨이트리스, 마담, 양공주 등 작품 속 등장 여성은 모두가 제 몫을 다한다. 여러모로 어리숙해 보이는 주인공들이지만, 일말의 배짱은 있다. 복수를 선언하고, 사표를 쓰며, 가족의 연을 내던져 버린다. 하지만 세상은 역시 호락호락하지 않다. 호기롭게 맞서지만 애처롭게 주저앉는 게 다반사. 피식 웃어넘기기엔 남일 같지 않은 이야기가 하나 둘 끝날 때마다 몸은 앞으로 숙여진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주인공을 응원하게 된다. 이것이 극화의 힘이 아닐까.

판화처럼 두터운 그림 선은 인물, 사건, 배경 모두에 힘을 실어준다. 하지만 배경과 선명히 분리되는 인물들은 마치 부조리극의 주인공들처럼 현실에 순응하지 않고 부유하는 느낌을 자아낸다. 인물과 인물의 교차도 마찬가지다. 남녀의 정사 장면조차 편안해 보이지 않는다. 모든 존재는 고독하고 결코 서로 이해될 수 없다는 듯 묘한 이질감을 만들어 낸다. 그렇다고 굵은 선들이 경직되어 있는 건 아니다. 여체에 닿으면 선은 얇았다가 굵어지고, 신음하듯 약동하며 미끄러져 흐른다. 애니메이션 『동경표류일기』는 무엇보다도 타츠미의 선을 기가 막히게 살려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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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공주의 깊은 절규를 담은 ‘굿바이’(상), 굵은 선마저 춤추게 만든 ‘안에 있어요’(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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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날을 위해 만화를 그려온 것 같다.”

한편 『동경표류일기』는 작품 곳곳에 만화계 거장에 대한 감사와 존경을 담고 있다. 도입부는 청년 타츠미의 테즈카 오사무에 대한 깊은 동경과 존경이 가득하다. 종반부에는 다섯 이야기의 주인공들과 중년의 타츠미를 재회시켜 관객을 대신해 주인공들이 만화가 타츠미에게 감사를 건네도록 한다. 그리고 모든 이야기가 끝날 무렵, 애니메이션 감독 에릭 쿠(Eric Khoo, 1965)는 타츠미 요시히로를 실사로 등장시켜 곧 끝날 그의 세계와 작품들이 『동경표류일기』를 통해 영원히 살아 숨 쉴 수 있도록, 최고의 예우를 갖춰 헌사한다.

전직 만화가였던 에릭 쿠 감독은 군대 시절 타츠미 요시히로의 작품을 접하고 이야기의 슬픔과 아름다움에 마음을 빼앗겼다고 한다. 2009년 싱가포르에 타츠미의 자전적 만화인 『표류일기』가 발행되자 그는 그 해10월 일본을 직접 방문해 타츠미 요시히로에게 애니메이션 제작 허락을 구한다. 타츠미 생전에 애니메이션을 헌정하기 원했던 감독은 2010년 3월 인도네시아 애니메이터들과 작업을 착수, 불과 1년여 만에 작품을 완성한다. 그리고 첫 상영장소로 싱가포르도 일본도 아닌 칸 영화제를 두드려 ‘주목할 만한 시선’으로 초대된다. 타츠미에 대한 에릭 쿠 감독의 헌사 여정이 시작된다.

애니메이션화 하는 과정에서 에릭 쿠 감독이 가장 신경 쓴 부분은 ‘목소리’였다. 원작에 충실하기 위해 싱가포르 애니메이션임에도 불구하고 영어가 아닌 일본어를 채택한다. 일본 유명 연극배우 베쇼 타츠야에게 청년 타츠야의 목소리를 맡기고, 심지어 타츠미 요시히로에게도 나레이션을 부탁했다. 한 인터뷰에서 감독은 1950년대 오사카 방언을 재현하기 위해 타츠미 요시히로로부터 직접 배우기도 했다고 밝혔다. 뿐만 아니라 감독은 애니메이션 스타일도 당시의 문법들을 사용했다고 한다. 알고 볼수록 디테일 마다 장인의 숨결이 담긴 작품이라 할 만하다. 완벽한 헌사를 위해 모든 시간과 문법을 70년대 이전으로 돌린 셈이다.

『동경표류일기』는 호기롭게 세상에 맞서지만 번번이 무너지고 마는, 그래도 담담하게 걸어 나가는 모습이 위안이 되고 힘이 되는 아주 묘한 작품이다. 완전 19금 성인물을 기대한다면 다소 실망할 수도 있다. 하지만 “스토리가 70, 나머지 30은 그리는 즐거움”이라고 말한 타츠미 요시히로의 말처럼 그의 이야기에는 천상 이야기꾼만이 들려주고 보여줄 수 있는 깊이가 있다. 특히 올해 초 타츠미 요시히로가 별세했기 때문에 『동경표류일기』의 의의는 더 특별하다 할 수 있다. 어차피 표류하는 인생, 기왕이면 제대로 표류한 선배들의 기술을 훔쳐보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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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표류일기 04Credit Rory Daniel (2 of 4)

자신의 작품과 재회하는 중년의 타츠미(상), 에릭 쿠 감독과 타츠미 요시히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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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er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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