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오쿠』 통탄할 남녀역전 시대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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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오쿠 표지

 

 

남자들이 지배하지 않는 세계

“…문득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네. 이 나라는 처음부터 이와 같은 나라였을까. 상가, 무가, 마을의 관리 할 것 없이 가업을 잇는 자는 어찌 하여 남자이름을 쓰는 것일까. 대외문서만 보면 마치 이 나라에는 남자밖에 없는 것 같지 않은가. 이래서야 도저히 나라의 상황을 파악하는 데 필요한 정확한 기록은 만들 수가 없지. 해서, 이 같은 관습은 당장이라도 폐지하고 싶은 마음이네만. 만일…. 그 관습에 의미가 있다면….” 『오오쿠』 1권 중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 정벌에 실패하고 죽음을 맞이하자,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차기 쇼군을 향한 야망을 숨기지 않았다. 도요토미 막부의 가신들은 제각각 살 길을 찾아 도쿠가와가 창설한 동군과 도쿠가와 토벌군인 서군으로 나뉘어 전쟁을 일으킨다. 1600년 동군과 서군 총 10만 병력이 세키가하라에서 전투를 벌이고, 결과는 도쿠가와의 동군이 승리했다. 서기 1603년 3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쇼군에 취임하며 에도에 막부를 창설한다. 그들은 총칼로 싸워 영토와 권력을 쟁취하는 무사들의 시대가 언제까지고 이어질 거라 생각했겠지만, 도쿠가와 가문에서 15명의 쇼군을 배출한 뒤 다시는 무가정치의 낌새조차 없이 메이지 시대로 흘러가버린다.

『오오쿠』는 도쿠가와 치세의 에도시대를 그린 작품이다. 권력의 정점에 선 쇼군을 따르는 수많은 가신들, 오직 쇼군의 후사를 생산하기 위해 간택되어 에도 성에 들어온 수많은 여자들. 농민들의 버거운 삶에 대조되는 상인들의 화려한 자태, 그 속에서 피어나는 전통문화와 서양문물의 유입으로 확장되는 세계관 등 에도시대는 이 시대를 배경으로 한 수많은 작품들이 각각 나름의 재미를 가지고 있을 정도로 볼거리도, 말 할 거리도 많은 매력적인 시대다. 상업지 데뷔 전부터 BL(보이즈 러브)물을 그려왔던 작가는 긴 칼 찬 남자들이 지배하는 세계를 완전히 뒤집은 다음 이야기를 시작한다.

 

오오쿠 04

적면포창이 도시의 모습을 바꾸고 사회의 모습을 바꾸었다

 

여자는 나라를 지탱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기이함

적면포창이라는, 끔찍하게도 고열을 동반한 붉은 종기가 온 몸에 우둘투둘 번지고 특히 얼굴이 시뻘건 종기에 뒤덮인 채로 죽음을 맞이하는 병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어디에서 왔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문제는 정체불명의 전염병이 젊은 ‘남자’에게만 옮는다는 것이다. 한 마을에 농사를 지을 장정이 모두 사라질 정도로 병의 전염성은 강력했고, 결국 일본의 성비는 남자가 여자의 1/4밖에 안 될 정도로 떨어진다. 힘쓰는 일을 하고, 노동으로 가정을 일으켜 세우고 집안을 먹여 살리던 남자들이 거리에서 사라졌다. 자연스럽게 이 일들은 여자의 몫으로 돌아왔다. 젊은 남자는 꽃보다 귀한 존재였다. 그들은 여자들에게 ‘씨를 심어주는’ 것 외에는 어떠한 일도 하지 않는다. 병이 옮을 것이 두려워 집 밖에 젊은 사내를 내놓지 않는다. 그것이 당연한 시대가 되었다.

이야기는 적면포창이 일반적인 풍토병으로 자리 잡았고, 치료법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라 남성의 수가 극히 적은 8대 도쿠가와 쇼군인 ‘도쿠가와 요시무네’의 취임과 함께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요시무네는 역대 쇼군들 중 처음으로 쇼군의 직계자손이 아닌 방계에서 옹립된 케이스였다. 에도에서 한참 떨어진 시골, 기슈 번의 영주였고 그 전에는 지방 영주의 3녀에 불과해 언감생심 쇼군 자리는 꿈도 꾸지 못했던 요시무네는 어째서 선대 쇼군들은 의문을 가지지 않았을까 싶은 근원적인 것에 질문을 던진다. ‘이 나라는 처음부터 이와 같은 나라였을까?’ 오오쿠 성에서 일어난 모든 일이 기록된 문서를 열람하러 간 그녀는 마침내 판도라의 상자를 연다.

‘오오쿠’는 본디 ‘에도 성 내에 도쿠가와 쇼군의 처첩, 생모, 자녀 등 그를 따르는 시녀들이 거처하던 곳을 가리키는 말(출처: 위키백과)’이다. 이것이 『오오쿠』에서는 도쿠가와 쇼군의 남편과 남자 첩, 생모, 자녀 등 그를 따르는 시종들이 거처하던 곳으로 바뀌었다. 앞서 말했듯 『오오쿠』는 단순히 쇼군이 남자로 바뀐 에도시대를 말하는데 그치지 않는다. 역병이 돌고, 남성이 줄어들어 성비가 무너진 나라는 당장 망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마비된다. 노동으로 토지를 일구는 자가 사라진다. 물건을 운반하고 흥정하던 자들이 사라진다. 정사를 논하던 가신들이 사라진다.

요시나가 후미는 꼼꼼하게 역사적 사실에 자신이 창조한 새로운 에도시대를 이식시키는데 성공한다. 실제로 일어났던 역사적 사건을 여성 쇼군의 시대에 맞게 의도를 각색하고 인물에게 새로운 성격을 부여하며 사건 후의 결과까지 역사의 시계가 어긋나지 않도록 했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 남성들의 무가정치가 여성의 수가 몇 배로 많은 세상이 되면서 여성을 가문의 후계자로 지정할 수밖에 없게 되자 자연스럽게 문치정치로 넘어 가게된 것, 선대보다 뛰어난 정치감각을 드러내며 선정을 펼쳤던 쇼군 이에미츠가 오오쿠의 (필요 없는)미남자들을 대거 정리해 시장에 공급하여(?) 환락가인 요시와라를 번창시켜 지역경제발전에 공헌한 것, 농업기술의 발전이 육체노동에 취약했던 여성들에게 도움이 되어 남성에 준하는 노동력을 갖출 수 있게 되었다는 설정 같은 것들이 그것.

 

오오쿠 특성01

만화 『오오쿠』는 여러 번 영화와 드라마로도 제작되었다. 본 스틸컷은 겐로쿠 시대, 츠나요시 치세의 이야기를 다룬 『오오쿠』. 칸노 미호가 주연을 맡았다

 

세상이 뒤집어졌기에 태어난 비극과 암투 열전

재미있는 것은 『오오쿠』에서 남녀가 역전되었다고 해서 그들이 담당하는 모든 역할까지도 역전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3대 쇼군 이에미츠가 적면포창으로 죽자 갑자기 불려와 그림자 쇼군 행세를 하게 된 최초의 여자 쇼군 이에미츠는 어디까지나 자신을 ‘도쿠가와 막부체제의 희생양’으로 생각하고, 무사히 남자 후사를 출산해 4대 쇼군은 정상적(?)으로 돌리기 위한 이음매일 뿐이라 생각했다. 결국 남자아이가 없어 다시금 여자를 쇼군으로 정해야했고, 그것이 반복되며 대부분의 고매한 가문에서도 딸을 후계자로 인정하는 분위기로 흘러갔다. 다만 철저히 남자이름으로 호적에 올렸고, 입성할 때도 남자차림을 했다. 모두가 옆자리에 엎드린 가신이 여자인 줄 알지만, 아는 체 하지 않고 자신도 여자인 티를 내지 않는 기이한 풍경. 지극히 현실적인 계산 하에 설계되어 마치 실제로 일이 닥치면 이렇게 흘러갈 것만 같은, 불공정하기 이를 데 없는 여자들의 세상.

이런 미묘한 공기 속에서 벌어지는 권력을 향한 투쟁과 암투, 칼로 베어버리지 않을 뿐 자리에 앉아 천리 앞을 내다보며 냉혹하게 말을 움직이는 책사들의 모략이 만연한다. 궁중의 암투는 어디나 마찬가지다. 누구를 후계자로 만들 것인가. 누가 절대권력 옆에서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를 꿰차고 복된 삶을 누릴 것인가.

 

오오쿠 05

‘도쿠가와의 혈통을 잇기 위한 씨받이’. 거칠고 자조적인 표현이나 작품 속 쇼군의 역할을 정확히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성비 불균형이 오지 않은 실제 세상에서도 별 다를 바 없이 쇼군의 아내에게 적용시킬 수 있는 말이기도 하다.

 

임신과 출산은, 세상이 열 번 뒤집어져도 남자들은 결코 할 수 없는 일이다. 적면포창이 돌지 않았다면 여전히 남자 쇼군이 수십 명의 처첩에서 난 자식들 중 누구를 후계자로 낙점할까 골머리를 앓았겠지만 『오오쿠』는 다르다. 아빠가 누구든 쇼군 자신이 엄마임에는 변함이 없으니 그들을 챙기면 될 일이다. 차라리 명확해서 여자 쇼군 쪽이 오히려 더 나은 것 아닐까? 생각이 잠깐 들지만 ‘남자를 골라 아이를 만들어야하는’ 것이 도쿠가와 치세를 유지하기 위한 의무가 되니 당사자들이 괴로워진다.

아버지, 쇼군 이에미츠가 처녀인 엄마를 강간해 태어난 딸 이에미츠는 아버지 대신 쇼군으로 삶을 마칠 때까지 오직 한 사내만을 사랑했지만 남아를 출산해 도쿠가와 가문을 반석에 올려놓기 위해 오오쿠의 수많은 남자들과 잠자리를 했다. 뒤를 이어 쇼군이 된 그녀의 딸 이에츠나는 선대가 사랑했던 그 사내를 마찬가지로 사랑했다. 5대 쇼군인 츠나요시는 여성의 몸을 잘 몰랐던 아버지의 바람대로 임신할 수 없는 나이가 되어서도 남자와 수없이 동침했다. 좋은 후계자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먼저 남자를 동하게 해야 한”다며 서책을 보며 지식을 쌓는 것 보다 외모를 가꾸고 남자를 기쁘게 하는 방법을 익혔다. 여 쇼군들의 이런 ‘의무’는 그들의 애틋한 감정, 사랑을, 나아가서는 삶과 존엄을 무참히 짓밟았다.

 

『오오쿠』 속 쇼군들은 가혹한 시대를 견뎠다. 평범하게 농사를 짓고 일하는 여자들이 일본을 지켜냈다. 이 세계의 불치병인 적면포창을 뿌리 뽑고자 치료법을 강구하는 움직임도 쇼군 주도하에 생겨났다. 그러나 역사의 시계는 그리 순순히 정방향으로 흐르려 하지 않는다. 막부 말의 혼돈을 떠올린다면 『오오쿠』 역시 끝까지 순탄하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것쯤은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에도 성에 오오쿠를 만든 카스카노 츠보네는 기록담당인 고유히츠에게 “언젠가 이 나라는 망할 터이니, 그 가는 길을 끝까지 지켜보라는 의미”로 기록지의 이름을 ‘몰일록’이라 명명했다. 남성 중심의 봉건사회가 붕괴되는 것을 목격한 그녀(!)는 새로운 형태의 세상을 상상하지 못했던, 구시대의 유물이었다. 오오쿠의 붕괴는 곧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뜻하는 일본의, 역사. 마치 평행우주 속 또 다른 에도시대를 들여다보듯 『오오쿠』 역시 마지막까지 지켜보자. 그 끝에 어떤 결과가 기다리고 있을지 직접 목격하기 전까지는 알 것 같으면서도 전혀 알 수 없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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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개

  1. 작가의 상상력에 감탄을 거듭하게되는 작품입니다. 적면포창이라는 병 하나로 자연스럽게 남녀역전을 시키는 것고 그렇고, 남녀가 바뀌었음에도 모든 역사가 그대로 자연스럽게 흘러갑니다. 이쯤하면 작가는 천재. 요시나가후미만의 간결하고 유려한 그림체에 수많은 인물 하나하나를 입체적으로 표현하는 작가의 표현력이 더해져 더해진 돈아깝지않은 소장용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작가는 어쩌면 버릴 작품이 하나도 없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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