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하는 영혼이 사는 우주, 『제멋대로 함선 디오티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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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멋대로 함선 디오티마』 , 권교정 지음, 4권까지 출간(미완), 길찾기 펴냄, 절판

『제멋대로 함선 디오티마』
권교정 지음, 4권까지 출간(미완), 길찾기 펴냄, 절판

 

『제멋대로 함선 디오티마』는 연재잡지 운이 지독히도 없는 작가인 권교정의 작품 중에서도 가장 혹독한 수난을 겪은 작품이다. 1999년 《화이트》에서 연재를 시작한 이래 무려 네 번이나 출판사를 옮겨 다니며 연재중단과 재개를 거듭했고, 2008년 장르문학 전문잡지 《판타스틱》을 마지막으로 중단된 뒤, 작가의 건강문제까지 겹치며 훗날을 장담할 수 없는 상태가 됐다. 단행본은 도서출판 길찾기에서 4권까지 발매됐다. 최신형 우주 정거장인 ‘디오티마’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 본격적인 SF물로, 인간과 우주, 생명에 대한 철학적인 고찰이 돋보이는 만화다.

 

이것이 '함선' 디오티마.  이미지 출처 : 교월드 http://www.gyoworld.net

이것이 ‘함선’ 디오티마.
이미지 출처 : 교월드 http://www.gyoworld.net

 

본격적인 SF를 통해 인간과 세계를 들여다보다

1990년대 중반은 한국 순정만화에 있어서 외양과 내면이 동시에 확장된 중요한 분기점이었다. 그 이전의 순정만화가 고전적인 여성상과 극적인 감정표현이 넘쳐나던 시기였다면, 90년대 이후의 작품들은 판타지와 SF, 스릴러 등 폭넓은 소재를 넘나드는 한편, 주제 면에서도 전형성을 과감하게 깨버리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권교정은 인간과에 대한 사색을 일관되게 이어오며 독특한 작품세계를 구축한 작가다.

『제멋대로 함선 디오티마』는 그런 권교정의 인간관과 철학이 집약되어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순정만화에서는 보기 드문 본격적인 SF물이다. 물론 국내 순정만화에서 SF라는 장르 자체의 수가 적은 편은 아니지만, 대부분은 이야기와 캐릭터가 중심이었고, SF적 설정은 이를 위한 보조적인 배경으로 쓰인 경우가 많았다. 반면 『제멋대로 함선 디오티마』는 SF의 장르적 문법에도 매우 충실하다. 우주와 우주선 등에 대한 묘사, 우주복의 재질이나 중력의 물리학 고증까지 등장하는 과학적 설정의 세세함은 인상적이다. 특히 중력은 이 작품에서 사람들 간의 거리와 소통을 이야기하는 중요한 매개로 쓰인다. 달에서 태어나 자라서 지구의 중력에 적응할 수 없는 월인(月人) 소년의 이야기는 인상적이다.

다만 『제멋대로 함선 디오티마』는 장대한 우주에서 펼쳐지는 드라마틱한 모험담이나 활극과는 거리가 멀다. 미지의 외계생물이나 행성간의 전쟁은 등장하지 않는다. 디오티마는 지구와 달 사이의 라그랑쥬 점(두 천체 간의 인력과 원심력이 균형을 이루는 점)에 정박 중인 직경 2km의 우주 스테이션이다. 이곳에서 작가는 우주를 마주한 사람들이 체감하는 아름다움과 감동, 경외, 고독 등을 현실적으로 펼쳐놓는다, 그리고 우주라는 압도적인 공간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은 오히려 특별하지 않다. 너무나 현실적이라 느긋하리만치 자연스럽게 보일 정도다(권교정 특유의 느긋한 그림체와 무심한 유머 때문이기도 하다). 우주선과 워프 항법이 등장하는 2092년이지만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형태와 사고방식은 지금과 다를 게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평범한 일상 속에는 보편적이지만 하나하나가 다른 인간의 삶, 공기처럼 익숙하지만 매 순간 특별한 감정, 그리고 세계의 본질에 대한 섬세한 사색과 지적 호기심이 깃들어있다.

 

디오티마의 승무월들. 제일 오른쪽이 함장 나머 쥰, 세 번째가 부함장 지온.

디오티마의 승무월들. 제일 오른쪽이 함장 나머 쥰, 세 번째가 부함장 지온.
이미지 출처 : 교월드 http://www.gyoworld.net

 

진화하는 영혼, 그리고 인간의 유한성을 초월한 존재

디오티마(Diotima)는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이 자신의 저서에서 창조한 지혜로운 여성이다. 그리고 『제멋대로 함선 디오티마』에는 두 명의 디오티마 이야기가 플래시백 시점으로 등장한다. 한 명은 2천 년 전 최초로 달의 둘레를 측정했던 아리스타코스의 동반자였던 지적인 여성, 다른 한 명은 26년 전 우주에서 폭발사고가 일어났을 때 쌍둥이 천재 과학자 지니어스 형제를 살리고 죽은 우주선장이다. 그리고 ‘진화하는 영혼’이라는 뜻의 디오티마가 우주함선의 이름이 된 것은 의미심장하다.

『제멋대로 함선 디오티마』에는 다양한 사연을 가진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전체적인 이야기의 구심점은 함장 ‘나머 준’과 부함장 ‘지온 훗첸플로프’다. 나머 준은 불과 26세의 나이로 디오티마의 역장으로 부임한다. 사실 디오티마는 지니어스 형제가 나머 준을 위해 만든 것이었고, 그녀는 ‘원래 역이지만 이론상 초속 540km로 움직일 수 있는’ 디오티마를 이끌고 제멋대로의 항해를 시작한다(그녀가 ‘역장’이 아닌 ‘함장’으로 불리는 이유다). 그녀는 ‘행성이 지나가다가 뒤를 돌아볼 정도’의 미인이지만 옷차림이나 몸가짐에 좀체 신경을 쓰지 않을뿐더러, 아무데서나 침을 흘리며 자거나 비듬을 터는 무신경의 소유자다. 그러나 일단 함장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할 때는 최고의 역량을 발휘하는 인물이다. 함선 디오티마의 여정은 이 기이한 매력의 여주인공을 탐구하는 과정과 방향을 같이 한다. 어딘가 관조적인 분위기를 풍기며 좀처럼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하지 않는 그녀를 관찰하고 서술하는 것은 부함장 지온의 몫이다. 게으르고 헐렁한 미녀 나머 준, 고지식하고 순진한 미남 지온은 묘하게 어울리는 페어가 되며, (비록 지온의 일방적인 사랑이지만) 이들 사이의 로맨스 기류는 작품의 소소한 재미가 된다.

4권까지 발매된 시점을 기준으로 볼 때, 나머 준과 함선 디오티마의 정체에 대해서 명확하게 밝혀진 것은 없다. 다만 짚고 넘어갈 수 있는 단서는 몇 가지 있다. 앞에서 나온 두 사람의 디오티마는 아마도 나머 준과 동일인물이라는 것이다. 그녀는 윤회나 영생이라는 형태로 되풀이되는 게 아닐까 하는 유추가 가능하다. 인간의 유한성을 초월해서 지혜와 지식을 흡수해온 나머 준의 존재는 그 자체가 이 작품의 세계관, 철학을 관통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가 평범하고 유한한 사람들과 마주치며 흘려보내는 대화와 몸짓은 모두 인간의 본질에 대한 질문이 되고, 사소한 것까지도 의미를 지닌다.

 

원래 6권 완결 예정으로 시작된 『제멋대로 함선 디오티마』의 앞날은 여전히 불투명하다. 2008년 《판타스틱》의 휴간과 함께 기약 없는 연재중단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사실 이는 만화계의 고질적인 폐단인 만큼, 유명작품이 이와 비슷한 풍파를 겪은 경우는 드물지 않았다. 그러나 『제멋대로 함선 디오티마』처럼 십 년 동안 네 번이나 매체를 옮기며 연재와 중단을 반복한 기구한 작품은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홈페이지 ‘교월드(http://www.gyoworld.net)’를 중심으로 유독 높은 유대감을 보였던 권교정의 팬들로서는 더 안타까울 수밖에 없을 듯. 현재 암 투병으로 인해 건강이 좋지 않은 작가가 하루빨리 털고 일어나서 뒷이야기를 들고 돌아오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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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진 소개

만화책더미를 주체 못해서 독립해서 사는 누나가 있다. 그 덕분에 중학교 때부터 만화 하나는 죽어라 하고, 죽어도 원 없을 정도로 보고 자랐다. 2007년부터 2011년까지 월간PAPER 에디터로 일했으며, 최근에는 박리다매 프리랜서로 목숨을 부지하는 중. 음악, 스포츠, 영화, 만화 등 쓰라면 쓰라는 대로 오지랖 넓게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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